오늘날 배추김치를 만든 지니어스 우장춘 박사의 작품들
씨 없는 수박의 최초 시연자로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의 업적 중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 있어서 포스팅합니다.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는 오늘 날 우리가 먹는 배추의 품종을 튼실하게 개량한 장본인이고 그 외 제주감귤이나 강원도 감자 무 품종개량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배추가 가장 놀라웠습니다. 이 배추가 없었다면 우리가 현재 먹는 김치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왼쪽의 토종 배추(홀쭉이)를 열심히 개량해서 오른쪽 우리가 알고 있는 튼실한 모양의 배추로 진화했습니다. 덕분에 10년 전까지 중국 원산이라 차이니즈 캐비지(Chinese Cabbage)라 불리던 배추에서 한국산 배추만 김치 캐비지(Kimchi Cabbage)로 분리, 등재되는 결과도 생깁니다.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돌아보기 전에 아버지와 관련된 내용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1.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인 우범선은 중인 출신으로 양반 자제들한테 훈련을 시킬 때도 '네 이놈' 소리를 들으면서 수모를 당했고, 명성황후 시해 당시 현장에 있었던 조선인 훈련대 2대대장이었습니다. 휘하 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궁궐에 침입, 시해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4개월 정도를 돌아보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을 본보기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친일 개화 세력이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 여자와 결혼하고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우장춘 박사입니다. 우장춘이 5세 때(1903년) 우범선은 고종의 최측근인 고용근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친일파의 자식이고 살해당한 아비의 자식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죠.
2. 우장춘 박사의 종의 합성
그 후 지독한 가난과 조선인 혼혈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자란 우장춘은 농업대학 농학 실과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여러 논문을 발표합니다. 1930년 발표한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이 각광받게 되면서 알려집니다.
'종의 합성'은 서로 다른 종의 교배를 통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이론인데 이는 다윈의 진화론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이론이었다고 합니다. 다윈은 '종은 벽을 뛰어넘을 수 없다.'를 주장했죠.
3. 한국으로의 환국
광복 후 일본인 농학자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자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종사하던 농업이 큰 타격을 입습니다. 특히 김치의 재료인 무와 배추는 종자가 없어 일본에서 밀수입한 분량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이는 심각한 식량난을 초래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당시 김병규 경남 도지사와 김종 농림 국장이 우장춘 박사의 환국을 추진합니다. 우장춘 박사가 일본의 '다키이 농장'의 농장장을 할 때 김종은 포장장이었고 그래서 인연이 있었다고 하네요.
부산 동래지역 유지들 모임인 '동래 기흥회'에서 우장춘 박사의 귀국 후 시험농장과 한국 농업과학 연구소를 만드는데 힘을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우장춘 박사의 기념관도 부산 동래쪽에 생겼습니다.
4. 육종의 개발
우장춘 박사는 가족을 일본에 두고 홀로 환국해서 맨땅에 근대농업을 일으키고 무와 배추의 종자를 확보합니다. 우리나라만의 종을 개량하고 증식시키는 작업을 거쳐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우량종자 생산에 성공합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무와 배추의 원형이 1952년 진도에서 확보한 7천여 톤의 종자에서 나온 결실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품종개량으로 오늘날 우리가 풍족한 채소와 과일들을 먹을 수 있게 해준 일등공신입니다.
5. 생의 마감
많은 업적을 남겼고 인정받았지만 아버지의 과오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완벽한 신임을 얻지 못하며 일본으로 다시 돌아갈 거라는 의심을 삽니다.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임종 때 출국이 금지되면서 아버지의 조국을 위해 환국 해 나라를 위한 대가가 가족들을 보지 못하는 상황으로 인해 상심이 컸다고 합니다.
주변 지인과 우장춘 박사를 고맙게 여긴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성금을 보내는 등 위로를 해줬다고 하지만 고통이 많이 컸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안타깝네요.
밤샘과 노동으로 쇠약해진 우장춘 박사는 서울 출장 도중 십이지장 궤양으로 수술을 받던 중 회복하지 못하고 1959년 사망했습니다. 수원 여기산에 묘가 있다고 하네요.
임종 하루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상하며 건국 이래 2번째인 영애로운 상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라고 하네요. 우리나라를 기아에서 구한 사람인데 좀 더 대우를 잘 해주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친일파 후손 중에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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